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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닌 곳/기타 2015. 5. 19. 16:55

독일 트리아 - 서른 세번째 생일

서른 세번째 생일 새벽. 설핏 잠에서 깼을  세상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 세상 속에서 나는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해야  나이를 먹는 날을 세상에 대한 끓는 분노와 염려로 시작한다는 게 우울하게 느껴졌다. 






세시간을 구불구불 모 강을 끼고 기차를 타고  트리아의 호텔에는나보다 미리 도착한 튤립과 모젤 와인과 한국의 벚꽃잎 말린 것과, 신간 '세월호를 기록하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기다리고 있었다. 트리아에서 나는 이곳에  목적인 맑스의 생가 갔고,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사유하기만 했지만사유의 끝에는 행동을 해야 한다' 맑스의 문장을 읽었고, 책과 함께 들어 있던 엽서를 읽으며 튤립 냄새를 맡았다.



트리아는 서로마 제국의 지방 수도로, 굵직한 유적들을 보전하고 있다. 로마의 성벽, 포트라 니그라.





성벽에서 바라 보이는 트리아 시내.
(이 사진을 찍은 건 주요 건축물을 설명하는 프로필이 마치 펄스 쉐입 디스트리뷰션처럼 보여서였다.)




자그마한 트리아 광장은 관광객들로 활기차게 복작거렸다. 



H&M 건물에도 바로크인지 로코코인지 장식이 붙어 있는 게 귀여워서.




굉장히 난해한 오르간을 연주하던 대성당.



로마 최대 규모의 바실리카. 



광장 가운데에 모젤 와인을 시음하는 간이 바가 있다. 반짝이는 햇살과 햇살을 닮은 리슬링 와인과 와인을 닮은 노부부들.



맑스의 생가. 사후 꽤 지난 후에 맑스의 생가라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탓에, 건물 내부는 완전히 전시관으로 재탄생되어 맑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숙제 때문에 온 듯한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나오면서 맑스의 얼굴이 그려진 볼펜을 두 자루 샀다.



늦은 저녁, 아주 두꺼운 와인 리스트를 보유하고 있는 da weinhous로 걸어갔다. 원래 트리아에 가려던 목적은 맑스의 생가였는데, 조금 조사를 하다 보니 '어라, 이 지역 와인으로 유명하네...?'라는 걸 알게 되었고, 여행의 방향은 급선회하였다. 모젤 지역은 구불거리는 모젤 강을 따라 형성된, 최고 65도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가파른 포도밭으로 유명하고, 포도 종으로는 리슬링이 유명하다.

훈제 청어와 감자를 시켜서, 와인 세 잔을 곁들여 먹었다.

첫 잔은 weingut van volxem, wiltingen / 2013 schiefer riesling / riesling, trocken - 점원의 추천으로 마셨는데 달고 풍부한 리슬링이었다.
둘째 잔은 재미난 와인을 만든다는 weingut jos. christoffel jr., Ürzig의 2003 Ürziger Würzgarten Riesling auslese. 이건 지나치게 재미있었다. 젖은 신문지 냄새, 2003 빈티지다운 콤콤함, 산미와 쓴 맛이 전혀 없는 설탕물같은 맛. 독일어를 몰라서 'auslese'가 아이스 와인이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한참 청어를 먹던 도중에 시키는 바람에, 한 모금만 마시고 미뤄 두고 다른 잔을 시켰다.
weignut fritz haag branneberg / 2011 Brauneburger Juffer / riesling, feinherb, 다시 점원의 추천. 좋았다, 완벽한 리슬링. 
부엌에서 묵묵히 일하던 주인은 반가운 단골 손님들이 오자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뛰어 나와 맞고, 점원들은 지나치지 않으면서 따스한 친절을 베풀고, 음식과 와인 리스트는 두말할 필요도 없던, 더할 나위 없는 레스토랑.




다음날, 카이저 테르멘. 공사 도중 중단하고 용도를 변경해 마무리한 곳으로, 원래의 설계도가 힘들게 복구되어 있는데 로마시대 목욕, 여가의 규모란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입이 떡 벌어졌다. 





장미 크림색 선제후 궁전, 흐드러진 꽃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던 예쁜 커플.


 

원형 극장. 지하엔 옛날 무대장치가 저장되어 있던 큰 공간이 있고 지금은 지하수가 가득 차있다.

역사에 대한 회의로 마음이 혼란할 때, 유적 근처를 서성대는 것은 그 자체로 위로와 안식을 제공하는구나. 나중에 크리스랑 근처 작은 마을들에나 설렁설렁 여행만 다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젤 강을 끼고 더 북으로 올라가면 정말 기막힌 포도밭 언덕들이 나온다지만, 시간이 충분치 않으니까 도시 한 켠의 와인밭 중턱에 만들어진 와인 산책길(sickingen strasse)로 자전거를 끌고 갔다.




와인 산책길을 만든 너다섯 와이너리가 일주일씩 돌아가며 일년 내내 와인 테이스팅을 연다. 어쩐 일인지 그 중 한 와이너리가 특히 관광안내소에 홍보되어 있어서 (따로 예약 않아도 매시 와인 시음이 가능하다며), 시간도 없는데 허탕치고 싶지 않아 그리로 갔다. weingut georg fritz von nell, im tiergarten 12.


나의 모젤 와이너리 방문기:

1. 규모가 큰 곳이 아니어서, 주인을 만나서 착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2. 와인 테이스팅을 하고 싶다고 하자, 주인 아저씨가 아무 와인이나 끌어모아서 테이블에 올리곤 '하나,둘,...,다섯. 됐지?'하고 가셨다.

3. 그 중 한 와인은 뚜껑이 없고, 실온에 노출되어 있어서 달짝지근한 설탕물 상태였다.

(와인이 모두 캡마개였는데, 사실 이건, 과학적으로 캡마개를 폄하할 이유가 없다고 하니까 넘어가고)

(내준 와인잔이 작았는데, 이건 리슬링 잔은 왠진 몰라도 원래 그런 모양)

4. 비치되어 있는 와인 리스트와 비교해보니, 상받은 와인들이 안 나왔다. 자기가 만든 가장 맛좋은 와인을 자랑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없나봐.

5. 단체 손님들이 가면서 와인을 사는데, 와인병을 얇은 비닐봉지에 넣어 건넸다.

6. 와인에 페어링할 음식을 주문하려 하니 그런 건 없다며, 아마 와이프가 오면 수프 정도는 낼 수 있을 거야, 라고 하셨다.

7. 5종을 다 시음하고 나서 '오래된 와인은 시음할 수 없냐'고 보채자, 알아보겠다고 하곤 감감무소식이었다. 다른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을 마시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일어서려는 찰나 수프가 나왔는데, 수프가 혀를 델 정도로 뜨거웠다. 혀를 데면 어떻게 시음을 하란 말야?

8. 수프를 먹는 와중에 아저씨가 '오래된 와인 마시고 싶다고 했지?'하며 아이스 와인을 갖다 줬다. 디저트 와인은 수프를 다 먹고 나서 줘야지!

9. 아이스 와인을 마시고 나서 신문을 읽고 있는 아저씨에게로 다시 가서 '아이스와인이 아닌 오래된 리슬링은 없냐'고 보채자, 시음용으로 열려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여기 시음하러 온 사람들은 죄다 어느 동네에서도 만날 수 있는 와인만 마셔보고 간단 말야?


...어쨌든 한국에 가서 와인샵 사장님과 재미나게 마실 와인을 한 병 사고 싶은데 일정상 달리 기회가 없었기에, 그럼 오래된 와인 중에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하자 94년산 리슬링을 추천해 주었다.

'여기 리슬링들은 빈티지 빼고 (제조 방법은) 다 같은 거예요?'라고 묻자

'아니, 다 달라, 같은 와인은 하나도 없지!'라고 발끈하시는데, 그제야 좀 와이너리 주인 같았다. :)

아저씨는 나를 데리고 콤콤한 냄새가 가득한 지하 저장고로 가서 까만 더께가 가득 내려 앉은 와인 한 병을 쑥 집어서는, 라벨을 찾아서 붙이고, 비닐봉지에 둘둘 말아서 내어 주셨다. 가족 사진을 보여주며, 200년 전, 고고고...조부 때부터 하고 있는 와이너리라며 으스대셨다. 모든 와인을 오크통에 저장한다기에 3개월 저장하냐고 묻자, 먹어보고 더 오래 저장하기도 한다고.

와인을 받아 들고 기분 좋게 (나서면서 기분좋지 않은 와이너리는 세상에 하나도 없다!) 나오는데, 자전거를 끌어내다가 핸들에 코를 박아 멍이 들었다, 취했나보다.


먹은 와인:

2012/13 trierer thiergarten unterm kreuz riesling hochgewa"chs, 7,1g RZ : 시었다.

2012/13 trierer kurfu"rstenhofberg riesling hochgewa"chs, 18,6g RZ : 밸런스가 좋았다.

Elegance riesling feinherb 16,8g RZ : 재미있는 와인이어야 하는데, 밭이름을 붙여 파는 리슬링보다도 특징이 없었다.

2012/13 trierer benediktinerberg riesling hochgewa"chs lieblich : 김이 빠지지 않았으면 맛있지 않았을까.

2010 trierer burgberg riesling auslese edel : 이것도 노트에 '너무 달다'고 써있는데, 아이스 와인인 줄 알고 먹었으면 좋았을 것을.

2001 trierer kurfu"rstenhofberg riesling eiswein : 이건 아이스와인인 줄 알고 먹었기에, '단 맛이 부족하다'고 노트했다.ㅎㅎ 곰팡내가 진하다.


riesling, trocken, riesling hochgewa"chs, riesling feinherb, riesling auslese, riesling auslese edel, riesling eiswein은 무슨 차이인지 이제 대충 알겠는데,

도대체 trierer thiergarten unterm kreuz, trierer kurfu"rstenhofberg, trierer benediktinerberg, trierer burgberg, trierer kurfu"rstenhofberg는 다 뭐냐. 밭 이름인 것 같은데, 한 와이너리에 왜 이렇게 밭이 많아.



밤사이 꽃이 많이 피었다. 가지고 가려고 간이 물병까지 만들어서 안고 나서다가 생각해보니 가져 가봐야 프랑크프루트에 어차피 놓고 가야 하는구나, 나만 하루 더 볼 바에야 다른 사람들이 오래 두고 보라는 게 낫겠다 싶어 두고 왔는데, 마음이 아팠다.




다시 포도밭을 끼고 기차를 달려서 프랑크프루트로. 모젤 강에도 라인 강에도, 모래같은 걸 실은 길다란 화물선들이 수시로 오고 간다. 프랑크프루트는 좋은 인상이 아니어서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다. 아마 트리아보다는 프랑크푸르트가 독일의 진짜 얼굴에, 내가 사는 세상에 가까워서 그랬을 거다.
동화 속 마을같은 트리아에서 이틀 동안 세상 걱정을 잊고 잘 쉬다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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