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13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든 종류의 여행 2012/02/22 09:03

왜 기차는 추운 지방에 잘 어울릴까?

 러시아의 첫인상은 정말 '이국'이었다. 공항에 내려서 교통 수단에 대한 정보가 없는 채로 캐주얼하게 출발했으나, 지하철을 찾아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밤기차가 출발하는 벨로루스키 기차역에 가기까지 세시간이 넘게 걸렸다. 한동안 내가 정말 편한 곳들만 다녔구나 싶더라.


 밖은 -24도에서 -10도를 오갔지만 두 숫자의 차이를 체감할 수 없었는데, 추위가 싫지 않았다. 내가 싫어하는 건 싸늘한 실내 공기와 조금씩 조금씩 열평형을 이뤄가는 기분이지, 단단히 껴입고 쌀쌀한 시베리아의 바람을 뺨에 맞는 기분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지하철역들은 장엄하다.



사실은 비행기 안에서 언니가 부쳐준 에르미타쉬 미술관 책을 읽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 마지막 장을 덮으려는 순간, '월요일 휴관'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14일 오후 4시에 모스크바에서 집합해서 스쿨이 열리는 리조트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에르미타쉬에서 13일 딱 하루만 보내고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그게 월요일이었는데...
그래서 기차표를 환불할 수 있으면 환불하고 모스크바에서 시간을 보내야지라는 생각으로 기차역에 갔으나, 역시 언어 문제로 고난이도의 소통은 불가능했고, 나는 얌전히 기차표를 받아들고 맥주 한 병과 달걀 샐러드를 먹으며 기차 시간을 기다렸다. 러시아 맥주를 달라고 했더니 홀란드 맥주를 주었고, 러시아 담배인 줄 알고 샀는데 켄트였다. 역은 젋은 군인들과 배웅하는 가족들로 가득했다.

불친절한 직원들도 오랜만이고, 그리고 지하철을 알려준 남자, 다른 기차역에서 헤매는 나를 배웅해준 경비 아저씨, 같은 침대칸에 동승한 부부 등 딱딱한 사람들이 권하는 스스럼없고 리더쉽있는 친절들. 
러시아 국적기인 아에로플로트를 타고 올 때, 짐을 올리느라 몇명의 프랑스인들이 통로를 점유하고 있자 내 앞에 있는 일본인 남자는 가겠다는 제스추어를 취하지 않고 경직된 자세로 통로를 막아서고 1분 정도를 기다렸다. 실례한다고 말하며 비켜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통로를 점유하는 것은 예의바르지 않은 행동이므로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고, 일본인은 예의를 잘 알기 때문에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는 태도로 보였다. 예전에도 일기에 적은 적이 있지만, 한없이 친절하고 스스로를 굽히는 일본인이 돌변해서 우위를 점한 거만한 태도를 드러내는 유일한 때는 상대방이 먼저 룰을 어겼을 때이다. 그들에게 예의, 규칙 등은 서로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조절할 수 있는 상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이며, 그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위치의 가치이다. 또 모두가 동일하게 수용하고 있다고 가정되어 있어,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이 그 규칙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고려될 여지 없이 낙인이 찍혀서 마음껏(오해하려 들자면, 평소에 스스로를 낮추느라 참고 있던 분량까지) 멸시해도 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인가, 또 '세계인'들도 자신들과 비슷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예의나 규칙, 매너, 식사 예절 등만 우아하게 지키면 세계가 일본을 존경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제 일본의 상호 배려에 익숙해졌지만, 러시아의 자연스러운 불친절을 접하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와 스쳐 지나갈 때 순간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만들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 


내가 묵은 호스텔은 넵스키대로의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는데, 낡아빠지고 더러운 계단 등 건물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짐을 풀고 처음에 간 곳은 정치 역사 박물관. 이 사진은 박물관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아파트인데, 아파트가 이렇게 예쁘다.

박물관 설립자들은 영어 사용자들과도 소통을 하기 위해서 진열품 하나하나에 영어 목록을 만들어 두는 등 질과 양 면에서 훌륭한 노력을 기울여 놓았지만, 아무런 배경 없이 덜렁 간 나에게 감흥을 주는 전시품은 하나도 없었다. 인간이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노력을 또 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시도이기 때문에 소비에트의 시도와 비슷한 길을 가게 될 확률이 높은데, 왜 실패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여다볼 생각을 전혀 못 했을까 스스로에게 궁금해졌다. 또,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사회주의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소비에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다.
박물관 설립자들은 소비에트의 역사에 대해서 상당히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는데, 고급 단어가 많은 설명 패널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기획 전시였던, 소비에트 해체 과정에 대한 조망은 나중에 자료를 구해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
 



근처에 있던 페트로 파블로브스키 요새를 휘적휘적 걸어다니다가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가서 사과, 청어, 달걀이 든 샐러드와 러시아 만두를 먹었다. 친절한 미소년 웨이터에게 팁을 주고 싶었지만 팁을 주는 게 맞는지 어떻게 주는 건지 몰라서 거스름 푼돈이 조금 남는 액수를 계산서에 끼워서 아주 어색하게 건네고 나왔다.



모자이크로 유명한 피의 사원. 갈 때마다 시간을 못 맞춰서 세번째 시도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는데, 들어간 순간 '앗 잘못 들어왔다'라는 생각에 사진만 한 장 찍고 2분 만에 나왔다. 성당이 아니라 모자이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이어서 감흥이 없었는데, 그와 반대로 어둑한 조명과 향 내음, 신부님의 주문?과 사람들의 찬송, 그리고 사람들의 진실한 기도로 가득 차있던 카잔 성당은 참 매력적이었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성모 마리아의 그림 앞에 무릎을 꿇거나 키스를 하고 성호를 그으며 경배했는데, 나도 줄을 서서 소원을 빌었다. 그 경건함은 너무 벅차서 신자가 아닌 스스로가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어, 저절로 신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넵스키대로 부근. 뭘 봐도 시큰둥한 나에게도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문득 길을 걷다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내가 상상하던, 내가 보고 싶어하던 유럽이 이곳에 있었다.

호스텔에 갔을 때 남자들은 동양 여자애에게 친절함과 설렘이 담긴 미소를 보내주었었다. 아홉시쯤 돌아가 샤워를 한 후 근처의 바에 가서 한 잔 더 할까 말까 고민하며 침대에 엎어져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스스로의 방귀 소리에 잠이 깼다. 내 옆 침대에서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남자애의 키보드 치는 소리가 잠시 멎었다. 아아, 최악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스르륵 잠이 들었다가, 또 스스로의 방귀 소리에 깼다. 또다시 타닥타닥 소리가 잠시 멈췄다. 냄새가 안 나는, 바깥 공기와 별로 성분 차이가 없는 방귀라고, 그냥 베르누이의 원리에 의해서 소리 에너지가 생겼을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살금살금 도미토리를 빠져 나왔다.


전날 갔던 카페에 또 가서 아침을 먹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뉴욕에 있는 히로와, 나주에 있는 언니와, 보스턴에 있는 은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이른 아침의 넵스키 대로.


에르미타쉬에서 혹시나 하고 나고야대 학생증을 디밀어 보았더니 공짜로 표를 주었다.
루브르와 오르세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는데, 역시 커다란 박물관을 하루에 보는 것은 힘들다. 세계 각국의 유물이나 러시아 황실에는 관심이 없었고 미술 작품, 그 중 일부에만 도전했는데도 여러 세기를 넘나들며 감상하는 것은 힘들었다.
한국에서 마티스전에 갔을 때에는 몰랐는데 마티스가 참 좋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은 단 한 점이 있었을 뿐이지만 감동이 다른 모든 그림을 압도했다.
전시가 비교적 화파별로 나뉘어 있어서 선구자와 그 뒤를 따라간 작품들을 연달아 볼 수 있었다. 미술에서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그 전까지 인간이 넘을 수 없던 틀을 깨는 것이구나, 시도는 진리를 찾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진리고 명작이 되는 것이구나하고 생각했다.


189*년부터 있었다고 하는 오래된 카페에 가서 미소년 웨이터가 환한 웃음과 친절로 추천해준 저넉을 먹었다. 수프를 시켰는데 참치 김치찌개 맛이 났다. 나중에 스쿨이 열린 리조트 호텔에서 느낀 것인데 러시아에 한국 음식과 비슷한 조리법이 있다. 이번에는 팁에 실패하지 말아야지라고 긴장하며 백루블짜리 지폐를 한 장 더 끼워넣은 계산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도망쳤다.



히로가 말한 적 있는 차 가게에 가서, 히로에게 선물하려고 세 종류의 차를 각각 제일 작은 백에 담아 달라고 했으나, 나중에 보니 같은 차를 세개의 백에 나누어서 주었다. 점원이 초콜렛은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보길래 히로가 다크 초콜렛을 좋아하는 게 생각나서 달라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 날이 발렌타인데이였다.


기차역의 바에서 럼 몇 잔을 마시고 침대칸에 올랐다. 옆 침대 할머니가 푸근한 러시아말로 끊임없이 말을 거시고 나는 계속 바보같이 함박 웃음만 짓고 있었다. 손자의 통역을 통해 내 나이를 묻더니 파라미아비시인가 그러셨는데 통역해준 칭찬이 'you are good'이었다. 평소에 '식당에서', '기차역에서' 등으로 나뉘어 있는 회화책을 싫어했는데, 옥수와 내가 가져온 러시아어 책은... 앞 몇 장을 읽어보았지만 나는 '미안하다'도, '얼마예요'도 할 수 없었다...
 
저작자 표시

'모든 종류의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2-13 상트 페테르부르크  (3) 2012/02/22
Trackback 0 : Comments 3

Trackback Address :: http://majorana.tistory.com/trackback/221 관련글 쓰기

  1. anyway, 2012/02/22 11:44 Modify/Delete Reply

    술과 담배가 싼 좋은 나라-_- 러시아.
    에르미따쥬 좋지! +_+ 푸시킨 뮤지엄도 가봐. 좋아.
    (...라고 쓰다보니 이 글이 2월 13일의 얘기군;)

    나는 빠리보다는 모스크바와 뻬쩨르부르크가 훨씬 좋았어! 내가 좋아하는 크바스, 나 대신 많이 먹고 오렴. (...도 쓰고 너의 2-3월 일정을 다시 보니, 지금은 폴란드 바르샤바에 가 있겠구나;;)

    • 최고운 2012/02/22 15:48 Modify/Delete

      너도 뻬쩨르부르크가 빠리보다 좋았어? 나도. :D 이양.
      조금 있다가 크레믈린에 가서 휘휘 둘러보고 바르샤바로 가려고. :)

  2. anyway, 2012/02/22 11:48 Modify/Delete Reply

    이거 보니까 러시아 또 가고 싶다아...

Write a comment

◀ PREV : [1] : [2] : [3] : [4] : [5] : ... [168]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