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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닌 곳/기타 2016. 2. 18. 17:50

제네바


베네찌아에서 비행기와 버스를 갈아타는 새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로 왔기 때문에 언제 국경을 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한 건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에스프레소가 맹탕이 되었다는 거다.


썬에 왔다.

6년 전 왔을 때에는 어린이들 틈에 섞여 리셉션 센터의 전시관만 구경하고 등을 돌렸지만 이번에는 연구 단지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동안 더 나은 물리학자가 되어서는 아니고, 이제 친구들이 여기에서 일하고 있어서.ㅎ

카페테리아 앞 테이블에 앉아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와인 한 병을 비우면서 점심을 먹는데 햇볕이 등을 뚫을 듯이 쏟아진다. 한 쪽으로는 몽블랑, 다른 쪽으로는 쥬라산이 보인다.



선배가 카페테리아에서 와인 글라스를 집어오는 걸 보고 놀랐는데, 심지어 생맥주도 마실 수 있나 보다, 와.
해질 무렵 맥주 한 잔과 페이퍼를 앞에 놓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백발의 과학자.



스키 타고 돌아온 릴리를 만나 집에 왔다. 집에 돌아오면 야끼소바를 볶아 놓고 기다리던 내 와이프가 이제 무슨 슬라빅처럼 (슬라빅 맞다) 비트 수프에 빵을 내어주다니. 냉장고엔 갖가지 두부 대신 갖가지 치즈가 가득하고 - 하지만 욕실엔 익숙한 노란 때수건이.

일본에서처럼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우니 없던 잠도 소르르 몰려올 것 같다.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며 잠을 청하는데 릴리가

'근데 공기가 좀 모자란 거 같지 않아?'
'내가 아까부터 계속 방귀 뀌고 있어. 창문 열자.'
'...역시. I missed this so much!'
창문을 활짝 여니 알프스의 차갑고 달콤한 공기가 방안 가득 들어온다. 둘다 웃음이 터진 걸 못 멈추고 한 삼십분을 키득거리다가 잠들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어서 몽블랑쪽으로 1,2시간 더 들어간 flaine로 스키를 타러 갔다. 일행 중 한 명이 애인이랑 왔는데 그녀가 물리학자가 아니라고 하자 릴리가 대경실색한다. 

"그렇게 놀랄 일이야?" 

"맨날 썬에 처박혀 있는 애가 '보통 사람'을 사귀다니, 어디서 그럴 시간과 재주가 났대?"


내 실력으로 보드를 밀고 내려오기엔 좋은 슬로프가 아까우니까 스키를 신었다. 그린 슬로프에 올라가서는 멈출 줄도 몰라서 죽죽 미끄러지니까 발레가 이걸 언제 가르치나 걱정했는데, 올라한테 배운 게 기억나기 시작하자 이번엔 너무 씽씽 달려서 다칠까봐 걱정했다. 점심을 먹으려 다시 만난 릴리가 탐탁한 눈치로 '이제 나한테 배워도 되겠어'라며 데려가자 발레가 '따분한 건 다 나 시키고 이제 잘 타게 되니까 채간다'고 원망했다.ㅎ

스키가 보드에 비하면 훨씬 안정감이 들어서 속도내는 데에 겁을 내는 나도 재미있게 탈 수 있어 좋은데, 보드 탈 때 습관 때문에 자꾸 뒷꿈치에 힘을 주고 몸을 뒤로 빼서, 자세를 영 못 고쳐서 제 풀에 지쳐 시들해질까 걱정이네.



발레가 꼭 먹으라고 한 감자와 치즈와 베이컨을 섞어 구운 고열량의 따티플랫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잠깐 졸았다.



눈 앞에 몽블랑이 보여야 하는데 오후부터 눈발이 거세져서 뿌옇기만 하다. 점심을 먹은 곳은 해발 2400인가 600미터의 가장 높은 슬로프였는데, 초급자인 나, 타마라까지 다같이 스키를 타고 내려가기로 설득당했다.



눈발에 꽁꽁 언 얼굴에 바세린을 문질렀더니 영구 두 마리가 됨




스키를 신고 쪼르르 미끄러지는 작은 인간의 무리는 너무 귀엽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 오리들처럼.



기나긴 블루+ 슬로프를 무사히 내려온 후, 자신감이 지나치게 상승하여 상급자들을 따라 진짜 레드 슬로프에 한번 올라갔다가 스키를 벗어 던지고 굴러 내려오고 싶을 정도로 완전히 기진맥진했는데도, 단단히 신난 나는 욕심을 부려 기어이 폐장 직전까지 타고 - 탔다기보단 거의 스키에 실려 - 내려와서 따뜻한 멀드 와인을 마시며 몸을 말렸다. 오랜만에 눈놀이를 하니까 너무 신난다. 물놀이를 녹초가 되고 날 때까지 하고 나면 언제나 밀려오는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노곤한 몸을 감싼다.



차로 돌아오니 그새 이만큼 눈이 쌓여 있다.




저녁에 제네바 시내에 나가 라끌레를 먹었다. 취리히 옆동네 출신 스테판이 해주는 것과 다르게 파프리카 가루도 안 뿌리고, 베이컨도 안 굽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토미 마요네즈를 뿌리지 않는다니?! 문화충격.
저렇게 치즈가 가득한 접시를 세 판을 주는데, 두 판 반 먹고 포기하고 나머지는 샌드위치로 만들어서 싸가지고 왔다.

제네바 시내는 너무너무 조잡하다. 식당에서는 와인을 100ml 단위(!)로 시키고 조그만 카라프에 정확히 계량돼서 나온다. 맛과 멋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밀라노, 베네찌아, 제네바. 이번에 들른 도시들 모두 7년 전 언니와 함께 왔던 곳들이다. 그 때 나는 사교육으로 생활비와 등록금 벌이를 하고 있었고, 유로화 환율은 지금보다 50%쯤 높았다. 베네찌아 역에 짐을 맡기는 것만으로 4만원을 지출하고 그야말로 '상심'했던 게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고, 단돈 1,2유로 짜리 피자와 캔맥주를 사서 물가에 앉아 먹으며 기분을 풀던 것도 기억난다. 스위스에서는 아무리 피곤해도 호텔에 묵지 않고 캠핑장을 찾을 때까지 자전거를 탔고 (못 찾아서 대형 마켓 주차장에 텐트를 쳤던 적도 있고), 저녁 시간에는 식당에 출입하지 않았다.

이제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고, 가격을 보지도 않고 음식을 주문하고, 크로아티아에서 세일링 하자고 여름 휴가 계획을 의논하며 '유럽 중하층민의 생활 수준에서 유럽을 누리는' 스스로를 새로운 감회로 돌아 본다. '문제를 인식하는 공간'과 '사는 공간'의 괴리의 어디쯤에서 내가 누리는 것들의 선을 긋는 것이 나에게 맞춤한 '정의'일까 생각해 봐야겠다 싶기도 하고, 시스템 속에서 물리를 하다 보니 추구의 대상인 물리가 안락한 생활과 결탁해 버린 상황에 대해서도 그렇고.



월요일 아침, 공항으로 향하기 전에 썬의 아침 풍경을 보고 싶어서 들렀다. 릴리가 일하는 건물 내부에 벽화로 그려진 실물 크기의 CMS (아틀라스는 너무 커서 그려 넣을 수 없다).



릴리가 일하는 연구실. 




'과학자1' 열연중.



아침부터 삼삼오오 둘러 앉아 물리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바. 

나도 아침마다 미팅을 열어 물리 이야기를 하고, 쉬는 시간에도 물리 이야기를 하고, 복도에서 스치는 사람들도 물리 이야기를 하는 곳에 있고 싶다.

눈에 띄는 곳에 본받을 만한 다양한 물리학자들이 있어서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자연스럽게 동기 부여가 되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길이 단계별로 잘 보이고 조언도 많이 들을 수 있는 곳에 있고 싶다.

내가 하는 일이 집단 지성을 축적할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로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엘러건트한 일이라는 확신을 갖고, 종종 유치한 자부심과 애정이 넘쳐서 이런 패러디 비디오 - https://www.youtube.com/watch?v=-1AF7GwAxfI - 를 만드는 너드 동지들에 둘러싸여, 가끔은 가슴도 뛰면서 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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