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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닌 곳/기타 2016. 4. 27. 05:10어니스트, 조지, 스콧의 파리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스콧 피츠제럴드.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그냥 이름으로만 불러 봤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파리에서의 생활에 대해 쓴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세계의 모든 목소리가 파리를 통하던, 화려하고 덧없고 짧은 시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치 호밀밭의 파수꾼의 마지막 장면처럼, '쓸쓸한 아침 문닫힌 파리의 레스토랑 앞에 살그머니 내려 앉는, 먼지 속에 반짝이는 아침 햇빛'같은 아름답고 공허한 이미지로 마음에 남아 있는데, 책 읽은 기록을 샅샅이 뒤져봐도 그런 책이 안 나온다. 피츠제럴드가 파리에서 방탕한 생활을 한 건 사실이지만 책은 다른 작가가 쓴 것인데 잘못 기억하는 건가. ...셀린저였나?
헤밍웨이처럼 구석에 박혀 커피와 샌드위치로 가벼운 점심 식사를 하며 일을 하려고 두리번거리는데, 나비 넥타이와 숨막힐 듯 딱 맞는 조끼를 입은 말쑥한 웨이터가 다가와 '캐쥬얼 다이닝과 포멀 다이닝 중에 뭘 하겠냐' 묻는다. 캐쥬얼이라 답하니 안쪽 자리로 안내해 주는데, 북적거리는 점심 시간이라 어차피 고요한 분위기는 아니다. 차라리 헤밍웨이가 좋아했다는 정원에 붙은 자리로 옮겨 포멀 다이닝을 하기로 했다.
포멀한 다이닝은 많이 비싸냐, 메뉴를 보여달라하자 '오늘의 메뉴'는 별로 비싸지 않다며 펴보여준 웨이터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안내해 달라고 하자 나처럼 돈없어 보이는 사람이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기쁜 듯 웃어 보였다.ㅎ 불어로 쓰인 메뉴를 한참 쏘아보다가 '오늘의 애피타이저, 오늘의 메인 메뉴, 오늘의 디저트로 가져다 줘'라고 하자 '완벽해'라며 더욱 좋아하더니만, 내가 잘 먹는 모습을 확인하며 뿌듯해 하더니 '오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야'라며 기쁜 표정으로 디저트를 가져다 준다. 심장을 내줄 듯 화알짝 웃는 이탈리아인들의 인정도 좋지만 수줍게 웃는 은은한 프랑스인의 친절도 또 좋네.
룰루랄라 배를 두드리며 나오는 나를 피아노 연주자 아저씨가 안쪽으로 데려가서 헤밍웨이가 즐겨 앉던 자리를 보여줬다. 반들거리는 나무 바에 헤밍웨이의 이름이 조그맣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헤밍웨이가 한 때 살았던 노트르담 데샹 거리가 바로 뒤에 있다. 113번지는 찾을 수 없지만 - 왠일인지 111 다음에 115가 나온다 -, 그가 가곤 했다는 레스토랑 네그르 드 툴루즈 - 파도바로 이름이 바뀐 - 이 보인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 쯤 떨어져 있는, 헤밍웨이가 스콧 피츠제럴드를 처음 만났던 '딩고 바'는 딴 판의, 그다지 매력 없어 보이는 가게로 바뀌어 있어서 발걸음을 돌렸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예술가 타입'의 기인이었던 모양으로, 그와의 만남에 대해 적은 헤밍웨이의 기술이 담담하고 성실해서 스콧의 기이함이 더욱 익살스럽게 드러난다.
창 밖은 밝은 파랑의 하늘 아래 하얀 회벽을 바른 건물에서 반사되는 햇빛으로 눈이 부시다. 방 안까지 굳이 침범해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나는 시간이 느리지만 성실하게 흘러 지나가기를 숨죽이고 기다렸다.
뤽상부르 공원. 내가 묵던 호텔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월요일인데도 햇볕을 즐기러 나온 이들로 북적였다.
못가에서는 아이들이 헤밍웨이의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작대기로 보트를 밀어내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공원을 한바퀴 둘러보자 오후 4시가 지나 있었다. 배가 고플 때 세잔의 그림이 더 잘 보였다는 헤밍웨이를 따라 뤽상부르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려 있는 세잔의 그림이라곤 'le buffet' 정물 유화 한 점에 스케치 습작 한 점 뿐이었지만, 그 앞에서 한참 골몰했다. 20분 가까이 뚫어져라 들여다 봐도 딱히 알게 된 건 없었지만, 박물관을 나설 때에는 기분이 훨씬 밝아져 있었다. 아마 물리를 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것일 텐데, 문제는 물리가 직업이 되었다는 것.
카페 리프로 가는 길에 근사한 서점을 지나쳤다. 나오미 클라인과 오일러가 이웃해 꽂혀 있는 서점. 그 사이에 꽂혀 있는 알랭 바디우의 수학책은 읽어보고 싶어졌다.
카페 앞에 단정한 교회가 눈에 띄어 발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찾아보니 Église de Saint Germain des Prés라는 성당이었는데 마침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구석자리의 작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신도들처럼 두 손을 얼굴에 얹고 이마를 앞걸상에 대자 따뜻하고 미끌거리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명도 빠짐없이 위로를 필요로 한다. 신을 믿지 않지만 가끔 성당에 오는 것은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뤽상부르 박물관에서 나와 공원 의자에 앉아 와인을 텀블러에 쫄쫄 따라 마셔가며 카르푸에서 산 빵과 치즈, 브라운 새우 한 팩을 먹어 치운 터였으므로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았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헤밍웨이처럼 맥주를 시키고, 안주로는 굴을 주문했다. 굴이 너무 신선해서 깜짝 놀랐다. 카페 리프, 신선한 굴, 맛있는 맥주. 완벽하군.
어디에서 왔냐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저녁 먹으러 멀리까지 왔네'라며 농을 건넨 웨이터가,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거야'라며 남아 있는 굴이 가까이 오도록 접시를 돌려주더니 자기가 찍는 사진들에 대해 한참 수다를 떤다. 관광도시인데, 어째 이렇게 외국인에게 꺼내 줄 관심과 친절들이 많을까.
만취해서 휘적휘적 지하철을 타고 호텔에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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