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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닌 곳/기타 2016. 4. 27. 05:10

어니스트, 조지, 스콧의 파리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스콧 피츠제럴드.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그냥 이름으로만 불러 봤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파리에서의 생활에 대해 쓴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세계의 모든 목소리가 파리를 통하던, 화려하고 덧없고 짧은 시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치 호밀밭의 파수꾼의 마지막 장면처럼, '쓸쓸한 아침 문닫힌 파리의 레스토랑 앞에 살그머니 내려 앉는, 먼지 속에 반짝이는 아침 햇빛'같은 아름답고 공허한 이미지로 마음에 남아 있는데, 책 읽은 기록을 샅샅이 뒤져봐도 그런 책이 안 나온다. 피츠제럴드가 파리에서 방탕한 생활을 한 건 사실이지만 책은 다른 작가가 쓴 것인데 잘못 기억하는 건가. ...셀린저였나?


대신 다른 작가 둘을 골라서 그들을 쫓기로 했다. 조지 오웰과 헤밍웨이. 그들이 책 속에서 파리에 머물렀던 시기는 1920~30년대, 십년 안팎으로 얼추 비슷했지만 처지들은 전혀 달랐다.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 파리 빈민가의 참상에 대한 체험 수기고, 헤밍웨이는 막 저널리스트에서 작가로 전환을 도모하고 있어 점심을 굶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래도 고료가 들어오면 오웰이 접시를 나르던 레스토랑에 식사를 하러 가는 형편이었고,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미 명성을 얻은 때였다. 아직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하기 전이다.

사실, 조지 오웰은 좋아하는 작가고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럭저럭이지만 헤밍웨이는 읽으려고 뜸만 들이고 있는 작가다. 사실은 전혀 친하지 않다. 이번 여행 가이드로 삼으려고 비행기에서 헤밍웨이가 말년에 쓴 젊은 시절의 회고록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었을 뿐이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작가를 선택해서 쫓아다니는 여행을 하려는 이유는,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저 공간을 옮기는 것만으로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자연이라면 별다른 기술 없이 감상할 수 있지만, 도시의 경우에는 다른 이들이 겪고 지어낸 이야기의 힘을 빌곤 한다. 삼십여년 동안 혼자 놀기로 터득한 노하우랄까. 물론 바쿠스의 힘도 빌면 더 좋고.



4월 17일 일요일. 파리에 도착해 짐을 풀고 헤밍웨이가 허구헌날 틀어박혀 글을 쓰던 곳, '내 구역'이라 정해 놓고 다른 작가들이 와서 말을 붙이면 신경질과 텃세를 부리던 곳, 카페 라라클로즈리 데릴라에 왔다. 그의 친구 네 장군 동상이 카페 앞에 아직도 늠름히 서있었다.





헤밍웨이처럼 구석에 박혀 커피와 샌드위치로 가벼운 점심 식사를 하며 일을 하려고 두리번거리는데, 나비 넥타이와 숨막힐 듯 딱 맞는 조끼를 입은 말쑥한 웨이터가 다가와 '캐쥬얼 다이닝과 포멀 다이닝 중에 뭘 하겠냐' 묻는다. 캐쥬얼이라 답하니 안쪽 자리로 안내해 주는데, 북적거리는 점심 시간이라 어차피 고요한 분위기는 아니다. 차라리 헤밍웨이가 좋아했다는 정원에 붙은 자리로 옮겨 포멀 다이닝을 하기로 했다. 



포멀한 다이닝은 많이 비싸냐, 메뉴를 보여달라하자 '오늘의 메뉴'는 별로 비싸지 않다며 펴보여준 웨이터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안내해 달라고 하자 나처럼 돈없어 보이는 사람이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기쁜 듯 웃어 보였다.ㅎ 불어로 쓰인 메뉴를 한참 쏘아보다가 '오늘의 애피타이저, 오늘의 메인 메뉴, 오늘의 디저트로 가져다 줘'라고 하자 '완벽해'라며 더욱 좋아하더니만, 내가 잘 먹는 모습을 확인하며 뿌듯해 하더니 '오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야'라며 기쁜 표정으로 디저트를 가져다 준다. 심장을 내줄 듯 화알짝 웃는 이탈리아인들의 인정도 좋지만 수줍게 웃는 은은한 프랑스인의 친절도 또 좋네.



룰루랄라 배를 두드리며 나오는 나를 피아노 연주자 아저씨가 안쪽으로 데려가서 헤밍웨이가 즐겨 앉던 자리를 보여줬다. 반들거리는 나무 바에 헤밍웨이의 이름이 조그맣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헤밍웨이가 한 때 살았던 노트르담 데샹 거리가 바로 뒤에 있다. 113번지는 찾을 수 없지만 - 왠일인지 111 다음에 115가 나온다 -, 그가 가곤 했다는 레스토랑 네그르 드 툴루즈 - 파도바로 이름이 바뀐 - 이 보인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 쯤 떨어져 있는, 헤밍웨이가 스콧 피츠제럴드를 처음 만났던 '딩고 바'는 딴 판의, 그다지 매력 없어 보이는 가게로 바뀌어 있어서 발걸음을 돌렸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예술가 타입'의 기인이었던 모양으로, 그와의 만남에 대해 적은 헤밍웨이의 기술이 담담하고 성실해서 스콧의 기이함이 더욱 익살스럽게 드러난다.




4월 18일. 드물게 찾아오는 위로가 필요한 날이었지만 나는 인간에게서 위로받는 방법을 모른다. 위로가 필요할 때 언제나 나는 혼자서 침잠한다.

창 밖은 밝은 파랑의 하늘 아래 하얀 회벽을 바른 건물에서 반사되는 햇빛으로 눈이 부시다. 방 안까지 굳이 침범해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나는 시간이 느리지만 성실하게 흘러 지나가기를 숨죽이고 기다렸다.





뤽상부르 공원. 내가 묵던 호텔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월요일인데도 햇볕을 즐기러 나온 이들로 북적였다.



 

못가에서는 아이들이 헤밍웨이의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작대기로 보트를 밀어내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공원을 한바퀴 둘러보자 오후 4시가 지나 있었다. 배가 고플 때 세잔의 그림이 더 잘 보였다는 헤밍웨이를 따라 뤽상부르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려 있는 세잔의 그림이라곤 'le buffet' 정물 유화 한 점에 스케치 습작 한 점 뿐이었지만, 그 앞에서 한참 골몰했다. 20분 가까이 뚫어져라 들여다 봐도 딱히 알게 된 건 없었지만, 박물관을 나설 때에는 기분이 훨씬 밝아져 있었다. 아마 물리를 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것일 텐데, 문제는 물리가 직업이 되었다는 것.



카페 리프로 가는 길에 근사한 서점을 지나쳤다. 나오미 클라인과 오일러가 이웃해 꽂혀 있는 서점. 그 사이에 꽂혀 있는 알랭 바디우의 수학책은 읽어보고 싶어졌다.


카페 앞에 단정한 교회가 눈에 띄어 발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찾아보니 Église de Saint Germain des Prés라는 성당이었는데 마침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구석자리의 작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신도들처럼 두 손을 얼굴에 얹고 이마를 앞걸상에 대자 따뜻하고 미끌거리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명도 빠짐없이 위로를 필요로 한다. 신을 믿지 않지만 가끔 성당에 오는 것은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뤽상부르 박물관에서 나와 공원 의자에 앉아 와인을 텀블러에 쫄쫄 따라 마셔가며 카르푸에서 산 빵과 치즈, 브라운 새우 한 팩을 먹어 치운 터였으므로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았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헤밍웨이처럼 맥주를 시키고, 안주로는 굴을 주문했다. 굴이 너무 신선해서 깜짝 놀랐다. 카페 리프, 신선한 굴, 맛있는 맥주. 완벽하군.


어디에서 왔냐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저녁 먹으러 멀리까지 왔네'라며 농을 건넨 웨이터가,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거야'라며 남아 있는 굴이 가까이 오도록 접시를 돌려주더니 자기가 찍는 사진들에 대해 한참 수다를 떤다. 관광도시인데, 어째 이렇게 외국인에게 꺼내 줄 관심과 친절들이 많을까.






4월 19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오후 2시 반까지 호텔에 틀어 박혀 일하다가 해가 기우는 걸 더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박차고 나왔다. 와인 한 병, 빵 한 덩이를 가방에 넣고 퐁뉘프 다리를 건너 시테 섬에 가서 적당히 강변에 주저 앉았다. 헤밍웨이가 말한 모샘치 낚시꾼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지만, 느릿느릿 오가는 화물선들을 구경하며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다. 


어제 마시던 와인 병을 다 비우고 생루이섬으로 건너 가서 가게마다 내붙여 놓은 메뉴판들에 모샘치 튀김이 있나 유심히 살펴봤지만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포기하고 적당히 39 유로에 디저트까지 내놓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는데, 실내가 세심하게 꾸며져 있는 것이 마음에 들어 사진을 찍으려고 뒤적거리니 핸드폰이 없다, 아까 시테 섬에 두고 온 모양이다. 웨이터에게 음식을 10분만 늦게 내놓으라 부탁하고 시테섬까지 뛰어 갔다 오는데, 나 왜 이렇게 잘 뛰지, 마지막으로 달리기한 지 한참 됐는데, 술도 꽤 됐는데. 혼자 감탄했다.


헉헉대며 돌아와 자리에 앉자 통통한 에스카르고 접시가 나온 다음 양갈비가 나왔는데,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가게 이름을 다시 확인하고 명함을 챙겼다. 'l'ilot vache', 생루이섬에서 식사를 하게 되면 여기에 가세요. 더 맛있는 양갈비는 어디에선가 먹어봤겠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조리된 접시는 처음이었다, 곁들인 감자와 당근 퓨레도 완벽했다. 치즈 플레잇이 나온 후, 디저트로 크렘블뤠를 주문했더니 마치 조리 학원에서 시험 볼 때 제출할 것 같은, 안은 차갑고 겉은 뜨겁고 파삭한 크렘블뤠가 나왔다. 내 입맛엔 너무 달았는데도 꾸역꾸역 다 먹은 것은 정성스럽게 조리한 음식을 남길 수가 없어서였다. 미국에서는 머핀이나 쿠키가 그저 공산품이어서 남길 수 있던가 보다. 이게 내가 유럽에만 오면 살찌는 이유야?
만취해서 휘적휘적 지하철을 타고 호텔에 돌아 왔다.




4월 20일. 미팅 디너가 잡힌 지역이 마침 조지 오웰과 헤밍웨이가 살던 구역이다. 이렇게 즐거운 우연이.
동료들을 먼저 식당으로 들여보내놓고 불과 20미터 거리에 위치한 헤밍웨이가 살던 집으로 향했다. 74 Rue du Cardinal Lemoine. 헤밍웨이를 기리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리 멀지 않은 6 Rue du Pot de Fer, 예전에 오웰이 살던 하숙집이 있던 자리는 완전히 번화한 식당가로 바뀌어 빈민가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저녁을 먹은 La Contrescarpe. 저녁 시간 내내 티어리와 리비아의 만담에 웃느라 얼얼해진 광대를 문질러가며, 와인을 세 카라프 비우고 얼큰하게 취해서 '파리는 정말 완벽해!'하고 거듭 외치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4월 22일. 호텔 크리옹은 샹젤리제 거리 건너, 콩코드 광장을 마주한 '명품' 가게들로 가득한 거리에 있다. 조지 오웰이 배를 곯는 와중에도 생기있게 보이려 뺨을 때려가며 취직해서 접시를 나르던 호텔. 이 곳에서 식사를 해야 하나, 겉에서 서성대고만 와야 하나 고민했는데, 정작 공사 중이어서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다음주에 다시 파리에 들르면 입구를 찾아서 들어갈지 말지 결정해야지. 메뉴에 굴이 있으면 들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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